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복궁 근정전 (문단 편집) == 역사 == 1395년(태조 4년)에 조선 정부에서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같이 지었다. 용 문양을 새긴 [[고려청자|청자]] 기와들로 지붕을 뒤덮어두어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중략)...우리 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중략). >----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002028_004|《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2월 28일 계묘 4번째 기사 중.]] 즉, 사극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된 고종 시기를 제외한 세종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의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은 청기와 건물로 표현해야 옳은 재현이라는 것이다. 세종 이후라 하는 이유는 1443년(세종 15)에 근정전 취두(鷲頭, 치미나 용두와 같은 망새로서 용마루 양쪽 끝에 세워 놓은 대형 장식 기와)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는데, 비싼 청기와와 아련와(牙鍊瓦, 조개껍질 가루를 발라 만든 기와)중에 무엇으로 덮을지 고민하면서 청기와를 정밀하고 좋게 구워 만드는 기술을 시험해 보라는 실록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유력하다. 기존에 청기와가 덮여 있었을 시 아련와를 고민한다는 것은, 더 값싼 아련와를 정전에 덮는 꼴이 되고, 편전은 이미 청기와가 있으니 격이 떨어지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단 사정전은 1553년(명종 8)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청기와로 복원했는지는 알 수 없어 선조 대의 사정전은 어떠했는지가 애매한 위치에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중묘조서연관사연도.png|width=100%]]}}} || || {{{#gold '''중종 시대에 그린 《의령남씨가전화첩》에 수록된[br]〈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 위 그림은 임진왜란 이전 근정전의 모습을 그린 그림 중 유일하게 현전하는 것이다. [[1535년]] 당시 국왕 [[중종(조선)|중종]]이 [[인종(조선)|왕세자]]의 책봉 16주년을 맞아 왕세자의 교육에 힘쓴 서연관 39명에게 베푼 연회를 묘사한 것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임난 이전에도 근정전의 [[경복궁 근정문|정문]]이 중층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작품이 그려진 시기로부터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근정전에 청기와가 사용되었다는 [[https://sillok.history.go.kr/id/kka_11512018_002|기록]]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표현되지 않은 까닭은 밝혀지지 않았다. 15년 사이에 모종의 사유로 근정전 지붕을 수리하였거나, 모사 과정에서 지붕에 덮인 기와를 잘못 그렸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불에 타 사라진 후 그의 아들 [[광해군]]이 복원을 시도했었는데, 이때 값비싼 청자 기와로 복원하려 해 많은 [[인조반정|반발]]을 사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묘조구궐진작도.jpg|width=100%]]}}} || || {{{#gold '''영조 시대에 그린 《의령남씨가전화첩》에 수록된[br]〈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 [[인조반정]]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복원을 포기했다. 대신 남아있는 돌 축대만을 일종의 예식 장소로 사용했음을 [[영조]] 때 그려진 《[[의령남씨가전화첩]]》에 수록된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를 통해 알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근정전 헤르만 산더 1906~1907년 촬영(국립민속박물관).jpg|width=100%]]}}} || || {{{#gold '''대한제국 시대 촬영된 경복궁 근정전[* 1906년 ~ 1907년 시기 촬영. [[https://www.nfm.go.kr/common/data/home/archive/detailPopup.do?seq=2006-002-00000381|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해당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 그 후 [[흥선대원군]]이 1867년(고종 4년) 중건했다. 이후 고종이 근정전에서 공식적으로 정도전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정도전에 대한 사면을 반포했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제국|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도 철거되지 않고 자리를 지켰으며 광복 이후 6.25 전쟁의 화마 속에서도 무사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85년]] [[1월 8일]]에 근정전을 국보 제223호로 지정했다. 현재 근정전의 모습은 2000년대 초 대대적인 보수와 수리를 거친 모습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